화웨이,
15일부터 ‘사면초가’…삼성·SK·LG도 반도체·디스플레이 거래 중단
‘미국 기술 적용 반도체’ 거래 제재 발효…화웨이 점유율 분산으로 국내 기업 타격 제한적
중국 화웨이를 상대로 한 미국 정부의 추가 제재가 오는 15일 발효를 앞두고 있다. 제재가 발효되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화웨이에 메모리 반도체 공급을 사실상 중단하게 된다. 삼성디스플레이와 LG디스플레이도 화웨이와의 거래를 끊을 것으로 알려졌다.
9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미국의 화웨이 추가 제재안이 적용되는 15일 이후 화웨이에 D램·낸드플래시 등 메모리 반도체를 공급하지 않을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화웨이와의 거래를 중단하는 건 미국 제재에 따른 조치다.
앞서 미국 정부는 지난달 17일 화웨이에 대한 추가 제재를 발표했다. 당시 미국 상무부는 “전세계 21개국에 있는 화웨이 계열사 38곳을 거래 제한 블랙리스트에 추가한다”며 “이번 조치는 미국 기술을 사용하면서 미국의 수출통제를 우회하려는 시도를 막을 것”이라고 밝혔다. 2019년 5월 화웨이가 미국 블랙리스트에 오른 이후 현재까지 추가된 화웨이 계열사는 152개로 늘었다.
해당 제재에 따르면, 제3국 기업도 미국의 소프트웨어(SW)와 기술·장비를 사용한 경우 화웨이 계열사에 대한 반도체 공급이 통제된다. 미국 정부는 사전 신청을 통해 허가(라이센스)를 얻으면 예외적으로 거래를 허용하도록 했지만, 구체적인 허가 기준은 밝혀지지 않았다.
블룸버그 등 외신은 미국의 추가 제재에 대해 “화웨이의 5G 기지국과 스마트폰 사업 모두에 더욱 큰 타격을 줄 가능성이 있다”며 “화웨이는
이들 제품을 만들기 위해 외국 기업이 납품하는 칩셋(반도체)에 크게 의존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지난달 추가 제재는 지난 5월 제재에서 수위를 높인 것이다. 애초 미국 상무부는 화웨이가 설계한 반도체 가운데 미국 소프트웨어와 기술·장비가
들어간 경우만 사전 승인을 받도록 했다. 화웨이가 위탁생산(파운드리) 기업을 통해 반도체를 수급하는 건 허용했었다. 15일 발효되는
제재는 다른 기업이 설계해 생산한 반도체도 사들이지 못하도록 막은 것이다. 화웨이는 주로 대만 파운드리 기업 TSMC에 반도체 위탁생산을
맡겨왔다. 미국 정부가 화웨이에 대한 위탁생산을 막자 TSMC는 화웨이와 거래를 끊겠다고 발표했다.
안 미치는 곳이 없는 미국 기술…부품 조달 난망 화웨이 ‘사면초가’
국내 기업도 영향 우려…화웨이 점유율 분산으로 장기적 타격은 제한적일 듯
반도체 설계 소프트웨어부터 생산 장비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서 미국 기업 기술에 전혀 의존하지 않는 기업은 거의 없다는 게 업계 설명이다. 블룸버그는 미국의 추가 제재가 발표되기 전인 6월 보도에서 “대만 파운드리 기업에서 중국 자체 반도체 기업에 이르기까지 지구상의 모든 반도체 제조기업은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AMAT)와 같은 미국 기업의 칩셋 조립 장비가 필요하다”며 “만약 미국 정부가 제재 수위를 높이면, 화웨이는 스스로 설계했더라도 진일보한 반도체를 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전했다.
반도체 장비 기업 AMAT는 네덜란드 ASML과 1·2위를 다툰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모두 AMAT와 ASML로부터 반도체 장비를 공급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ASML은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분야에서 첨단 기술력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는다. 노광은 웨이퍼에 빛을 쬐어 회로를 그리는 공정인데, 반도체는 광원이 얇을수록 동일 면적 웨이퍼에 더 많은 회로를 그릴 수 있다. 고성능 반도체에 ASML 장비가 필수적이라는 얘기다.
ASML은 네덜란드 기업이지만, 미국 기업 기술을 쓰고 있다. 블룸버그가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ASML이 만드는 장비는 투식스(II-VI)와
루멘텀 등 미국 기업 부품을 사용하고 있다. 반도체 후방 산업에 미국 기술·장비 기업이 포진돼 있어 미국의 화웨이 제재가 전방위적으로
확산할 수 있는 상황이다.
화웨이는 미국 제재에 대비해 반도체 재고를 확보해 온 것으로 보인다. 시장조사업체 디램익스체인지는 최근 보고서에서 “9월 중순부터 시작되는
추가 제재에 대비해 화웨이가 반도체 재고를 늘리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미국 제재가 장기화되면 재고만으로는 근본적인 반도체 수급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미국 정부가 강력한 제재 방안을 내놓은 와중에 기업들에 쉽게 화웨이와의 거래 허가를 내주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며 “국내 기업들이 사전 승인 신청을 한다고 해도, 실제 허가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메모리 반도체에 대한 거래가 승인된다고 해도,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칩셋 등 다른 부품들이 갖춰져야 스마트폰을 생산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화웨이는 완제품 생산에 필요한 여러 부품에서 수급 문제가 발생하면 특정 부품을 공급받아도 시장에 제품을 내놓을 수 없다는 얘기다.
화웨이는 그간 스마트폰에 자체 개발한 AP 칩셋 ‘기린’을 탑재해왔다. 자회사 하이실리콘이 설계해 TSMC에 위탁생산을 맡겼다. 하이실리콘이 AP 칩셋 설계 과정에서 미국 기업의 소프트웨어를 쓰고 TSMC와의 거래도 끊기면서, 기린 차기 모델 개발이 어려워졌다.
디스플레이 패널 수급에도 차질이 빚어질 전망이다. 업계에 따르면 삼성디스플레이와 LG디스플레이도 화웨이에 대한 디스플레이 패널 공급을 중단하기로 했다. 국내 디스플레이 기업이 사용하는 패널 구동 칩(DDI)이 미국 제재 대상에 포함된 탓이다. 디스플레이 업계 관계자는 “국내 디스플레이 기업의 공급 물량에서 화웨이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다”며 “미국에는 애플과 같은 거대 고객사가 있는데, 화웨이에 대한 거래 허가 신청을 내면서까지 미국 정부 심기를 건드릴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단기적으로 국내 기업도 영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증권가에서는 지난해 삼성전자 매출에서 화웨이 비중을 3.2%인 약 7조3,700억원
수준으로 추정한다. 삼성전자 5대 매출처에는 애플·도이치텔레콤·버라이즌·테크트로닉스와 함께 화웨이가 이름을 올리고 있다. SK하이닉스의
화웨이 향 매출 비중은 전체 매출의 11.4%인 약 3조원 수준으로 알려졌다.
다만, 장기적으로는 화웨이와의 거래 중단이 고스란히 매출 타격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화웨이의 시장점유율이 빠지면서 경쟁 관계에 있는 다른 기업의 수요가 늘어날 것이라는 설명이다. 디램익스체인지는 “메모리 반도체 기업은 화웨이에 공급하는 대부분의 D램과 낸드플래시를 다른 고객사에게도 팔 수 있다”며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수요에는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화웨이의 메모리 반도체에 대한 수요는 샤오미·오포·비보의 수요와 유사하다”며 “이들은 향후 화웨이의 시장 점유율을 차지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설명했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이외의 사업 분야에서 추가적인 반사이익도 기대된다. 삼성전자는 세계 스마트폰 시장에서 화웨이와 선두를 겨룬다. 화웨이가 시장에서 밀려나면 삼성전자의 판매량이 늘어날 가능성도 있다. 디램익스체인지는 부품 수급 차질이 장기화될 경우, 화웨이의 스마트폰 생산량이 올해 1억9천만대에서 내년에는 약 3천만~5천만대 수준으로 급락할 것으로 관측했다.